또 누룩을 생각한 사람, 국순당 배상면 2-1
누룩 하나를 붙들고 60년을 산 사람이 있다. 국순당을 세우고 백세주를 만든 배상면이다.
누룩은 밀이나 쌀 같은 곡물에 곰팡이와 효모를 키워 만든 발효제다. 막걸리도 약주도 누룩이 있어야 빚을 수 있다.
그는 자기 호를 우곡(又麯)이라 지었다. 늘 또 누룩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번 글에서는 백세주가 나오기 전, 실패와 연구로 채운 40년을 따라가 봤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백세주도 없었다.
양조장 하던 삼촌의 질문에서 시작된 공부
배상면은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농업전문학교 농예화학과에 다니던 시절, 양조장을 하던 삼촌이 술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 왔다.
제대로 답하고 싶어서 양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학교에 미생물 연구반을 꾸려 누룩 연구에 빠져들었다.
1950년 졸업한 뒤에는 6·25전쟁 중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그가 공부를 시작했을 때 우리 전통주는 이미 많이 사라진 뒤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집집마다 빚던 술은 명맥이 끊겼고, 시장에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 술이 자리를 잡았다.
기린소주로 거둔 첫 성공, 이어진 실패
1952년 그는 대구에 기린양조장을 열었다. 이곳에서 만든 기린소주가 큰 인기를 끌며 첫 사업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1955년에는 약주 '이화'를 내놨고, 1960년에는 쌀로 빚은 기린소주를 선보였다. 쌀로 술을 빚을 수 있던 마지막 몇 해였다.
하지만 이후 내놓은 약주, 합성 매실주, 리큐어는 잇따라 실패했다. 1963년에는 포항의 대송양조장을 인수해 막걸리를 빚으며 버텼다. 소주로 거둔 성공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 기린양조장이 문을 연 무렵, 1953년 대구 시내 중심가 (사진: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4.0, 위키미디어 공용) |
쌀로 술을 빚을 수 없던 시절
196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쌀로 술을 빚는 일이 금지됐다. 쌀이 귀하던 때라 막걸리는 수입 밀가루로 빚어야 했고, 우리 고유의 증류식 소주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배상면은 이 무렵 술 대신 술의 재료에 눈을 돌렸다. 1965년 누룩 역할을 하는 효소제를 개발했다. 곡물의 녹말을 술이 될 당분으로 바꾸는, 누룩이 하는 일을 맡는 재료였다.
1967년에는 전남 순천의 누룩 공장을 맡아 누룩을 키워 팔기 시작했고, 이어 한국미생물공업연구소를 세웠다. 술을 직접 팔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술을 빚는 양조장들은 여전히 좋은 누룩이 필요했다.
실험 도구가 모자라면 손수 만들어 썼다. 누룩이 발효되는 온도를 지키느라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 우리 술을 빚는 발효제, 누룩 (사진: Eugene Kim, CC BY 2.0, 위키미디어 공용) |
옛 문헌에서 찾아낸 생쌀 발효법
1975년에는 막걸리와 약주 기술을 다루는 전문지 「태양통신」을 펴냈다. 혼자 쌓은 기술을 다른 양조장과 나누는 통로였다.
1976년에는 주류회사 통폐합이 이뤄지면서 지역마다 술 회사가 정리됐다. 그는 "옛날에는 600종에 이를 만큼 술이 다양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며 안타까워했다.
그사이 옛 문헌을 뒤지며 사라진 전통 술 빚는 법도 연구했다.
일제강점기 술 산업을 기록한 『조선주조사』와 일본 청주 기술서를 직접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1982년 그는 쌀을 찌지 않고 날것 그대로 발효시키는 생쌀 발효법으로 전통술 제조 특허를 받았다. 옛 문헌 속에만 남아 있던 방식을 공장에서 쓸 수 있는 기술로 다듬은 것이었다.
이듬해인 1983년 누룩을 팔던 연구소를 배한산업으로 새로 꾸렸다. 자신과 아내 한상은의 성을 한 글자씩 딴 이름이었다. 이 회사가 훗날 국순당이 된다.
술이 안 팔릴 때 붙든 술의 뿌리
첫 성공 뒤에는 실패가 이어졌고, 나라 정책 때문에 쌀로 술을 빚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는 누룩과 효소라는 기초를 놓지 않았다.
그는 자서전 『도전 없는 삶은 향기 없는 술이다』에 이렇게 적었다.
누룩 연구와 술 빚는 일은 내 일생의 즐거움이다.
남들이 당장 팔리는 술을 찾을 때 그는 술의 뿌리를 파고들었다. 팔 술이 없을 때는 술의 재료를 팔았고, 그 재료를 연구하며 다음 술을 준비했다.
예순을 앞둔 나이에 세운 배한산업은 화려한 출발이 아니었다. 그래도 30년 가까이 쌓은 누룩 연구는 결국 한 병의 술로 돌아온다.
1986년, 그는 곧 서울을 찾을 외국 손님들에게 내놓을 우리 술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 이야기는 2-2편에서 이어진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배상면, 위키백과 배상면, 이투데이(2013), 시대일보(2013), 국가기록원 소주와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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